그런데 세종이 인재들에게 인센티브만을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국가 신뢰를 훼손하는 중대한 실책을 저지른 관리에게는 엄격히 처벌하였다. 한일 간 우호 관계를 깨뜨린 수군 지휘관 최완을 참형에 처한 일(세종실록 31년 4월 20일), 나라 곳간을 도둑질한 공직자 최맹온을 신하들의 반대에도 참형으로 단죄한 일(세종실록 7년 5월 19일), 진휼미를 훔친 수령 최세온 역시 참형에 처한 사례(세종실록 6년 8월 15일)가 대표적이다. 세종이 훙서할 때, 당대인들은 세종 치세의 비결의 하나로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엄정함에서 찾았다. 신상필벌의 핵심은 제도화에 있다. 자신의 행위가 어떤 보상이나 처벌로 이어질지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하고, 그에 따른 조치가 실제로 이뤄져야 한다. 특히 제도화는 자의적 포상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어떤 성과는 당대에 드러나지 않고, 다음 세대나 그 손자 세대에 이르러서야 결실을 맺기도 한다. 자신의 헌신이 후일이라도 정당하게 평가받을 것이라는 신뢰를 심어주어야 한다. 최고 권력자의 시혜가 아니라, 특허나 신분 안정처럼 제도적 보장이 뒷받침될 때 인재는 일에 몰입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세종이 맹인 음악가에게 ‘벼슬’이라는 인센티브를 부여한 일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1431년, 음악을 관장하던 관습도감의 책임자 박연은 시각장애인 음악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이들은 이미 시대의 쓰임이 되고 있으니[旣爲時用 기위시용], 국가가 이들을 돌봄은 마땅한 일입니다.” 박연에 따르면, 관현악을 맡은 시각장애인들은 “대부분 외롭고 가난하여도 하소연할 곳조차 없는 이들[無告之人 무고지인]”이었다. 게다가 관현악을 익히는 일이 워낙 고되다 보니, 젊은 시각장애인들은 점차 점쟁이로 전업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점을 치면 오히려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국가의 제례나 의식에 필요한 연주자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이었고, 이대로 가면 “장차 시각장애인의 음악은 끊어지고 말 것”이라는 게 박연의 깊은 우려였다. 박연은 시각장애인 음악가들에게 정기 급여 외에 쌀을 특별히 하사하여 “권려하고 흥기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특히 그들에게 관직을 제수해야 한다고 말하며, 그렇지 않으면 이들이 “이른바 세상의 버림받은 사람[天下之棄人]”이 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박연은 다음과 같은 등용 방침을 제시하였다. 오랫동안 공연을 한 자에게는 동반 5품 이상의 검직(檢職, 실무 없는 명예직)을, 젊고 총명하며 여러 악기에 능한 자에게는 7품 검직을 초임으로 제수하고, 연주에 능숙해지면 종6품 참직(參職), 즉 왕에게 나랏일을 아뢸 수 있는 벼슬을 주자고 말했다. 시각장애인 음악가를 양성하여 국가에 기여하게 하고, 본인은 물론 자손들에게도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파격적인 이 제안을 세종은 그대로 받아들였다(세종실록 13년 12월 25일). 세종의 결정은 단순한 시혜나 동정이 아니라, 재능 있는 이들을 제도 안에 품어 국가의 자산으로 길러낸 포용과 존중의 인사철학의 실천이었다. 장애 유무를 넘어 누구나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등용될 수 있다는 원칙이 600여 년 전 실현되었다는 점에서, 이는 대한민국 인사 제도의 이정표로 삼을 만하다. 오늘날 다양성과 포용의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는 시대에, 세종의 인센티브 제도는 지도자가 어떤 눈으로 인재를 바라보며, 어떤 철학으로 제도를 설계하느냐가 공동체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