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모의 '세종이야기'(제4호)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5-06-24 17:39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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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4호]

인재를 몰입시킨 세종의 파격적 인센티브

 종은 조선 전기 국왕 가운데 인센티브를 가장 효과적으로 운용한 임금이다.

 “포상(褒賞)”과 “은상(恩賞)”이라는 용어는 세종실록에 62차례 등장하는데, 이는 성종실록과 중종실록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수치다. 성종과 중종이 주로 반란 진압이나 반정 공신, 그리고 효자·열녀에 대한 예우와 격려 차원에서 포상을 내린 데 비해, 세종은 구휼에 힘쓴 지방관에게 특별 포상을 내리고[優加褒賞 우가포상](세종실록 1년 2월 16일)파저강 정벌에 공을 세운 장수들을 승진시켜 보답하는 등(세종실록 15년 5월 16일), 성과를 유도하는 수단으로 인센티브를 적극 활용하였다.

 세종도 물론 효행이 뛰어난 자에게 특별히 세금을 면제해 주었고 (세종실록 13년 10월 28일)사재를 털어 책방을 열고 인근 아이들을 가르친 유생에게는 정문(旌門 :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그 집 앞에 세운 붉은 문)을 세워 그 이름을 드높여 주었다(세종실록 18년 10월 8일). 근무 여건이 열악한 평안도와 함길도의 군사들에게는 별도의 포상을 시행하고(세종실록 26년 6월 3일), 명나라 외교에 꼭 필요하지만 잡기 어려운 송골매를 포획한 자에게는 벼슬이나 물품을 상으로 내리는 제도도 마련하였다(세종실록 24년 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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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에서 보듯이, 세종은 포상과 처벌을 다양하게 구사하고 있는데, 인재들로 하여금 일에 몰입해 성과를 내도록 이끈 세 가지 조치를 취하고 있다.

세종의 혁신적 인센티브 활용과 특별 승진 제도

 첫째는 ‘불차탁용(不次擢用)’이라 불린 특별 승진 제도이다. 뛰어난 인재라면 승진의 차례[次]에 구애받지 않고 곧장 발탁해 등용한[擢用] 사례가 세종실록에 다수 등장한다. 예컨대 천민 신분의 장영실을 종3품 대호군에까지 올렸으며, 아전 출신의 이예는 재상급인 종2품 동지중추원사로 중용하였다. 유능한 통역사 김하를 첨지중추원사에 발탁한 사례 역시 세종의 인재 운영을 잘 보여준다.

 

 이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았다. “30개월마다 한 차례씩 품계를 올리게” 한 기존 인사 규정에 어긋난다는 신하들의 비판이 그 예다. 이에 대해 세종은 “쓸 만한 인재가 있다면 승진 차례를 무시하고 발탁함이 어떠한가”라며, 이 제도의 시행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세종실록 12년 12월 27일).

 

 둘째는 인재의 부모를 돌보는 배려의 리더십이다. 인재를 뛰게 하려면 “임금이 그 마음을 몸소 알아주어야 한다”[當體其心 당체기심]는 게 세종의 생각이었다(세종실록 6년 11월 2일). 인재가 무엇에 마음을 쓰고, 누구를 소중히 여기는지를 살펴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국가에 대한 심리적 귀속감을 높였다. 함경도와 평안도 등 기피 지역에서 수고하던 하경복, 김종서, 이징옥의 어머니에게 세종은 각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예컨대 재위 6년째인 1424년, 세종은 함길도 도절제사 하경복의 어머니에게 명주실로 짠 비단 한 필과 쌀 30석을 하사하며 말했다. “하경복이 나라를 위해 변방에 진을 치고 근일에 승전하였으나, 그 어머니가 멀리 경상도 진주에 있고 집이 가난하니 그 마음이 어떠하랴”(세종실록 6년 11월 2일).

인재와 그 가족까지 품은 확장된 포용 리더십

 김종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북쪽 변방에서 7년간 근무하는 동안, 세종은 김종서의 노모가 작은 병이라도 앓으면 온갖 의약과 음식을 내려주었고(세종실록 18년 1월 21일), 그의 아내에게도 같은 혜양을 베풀었다. “김종서의 아내가 공주에 살며 오랜 병환으로 고생하니, 어육의 종류를 따지지 말고 계속 보내어 잘 보살피라”(세종실록 21년 윤2월 11일)는 지시가 그것이다.

 

 세심한 배려와 보살핌에 감동한 김종서의 어머니는 휴가 나온 아들에게 “네가 성상께 충성을 다한다면 나는 비록 죽더라도 유감이 없다”(세종실록 18년 1월 21일)고 말했다. 하경복의 동생 하경리가 왕에게 올린 ‘감사의 글’도 비슷하다. “신의 어머니께서 성상의 은혜를 입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시며, ‘네 형 하경복의 변방 근무로 인해 나를 부양할 자가 없음을 임금께서 걱정하시어, 너를 인근 고을로 특별히 제수하셨다. 너희 형제가 마음을 다해 직무를 수행해서 성상의 특별한 은혜에 보답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세종실록 8년 7월 18일). 한마디로 세종은 인재와 왕 개인 간의 관계를 넘어, 조직 전체의 신뢰와 안정 기반을 다지는 ‘확장된 포용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셋째는 인재에게 편지를 보내 감사와 격려를 전했다. 1424년 11월, 하경복 장군에게 보낸 편지가 좋은 예다.

   

 “야전 생활에 수고가 많겠구나. 경이 진에 부임할 때, 변방의 경보가 급해 명을 받고 곧바로떠나 노모를 뵐 겨를도 없었을 터이다. 내 이를 매우 민망히 여겨 사람을 보내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음은 경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경이 북쪽 국경을 지키기 시작한 이래, 변경이 날로 안정되었다. 외적이 침입했을 때, 경이 매번 격퇴하여 변방 백성들이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다. 지금 군사들이 경의 위엄과 은혜에 익숙하고, 적들은 경의 용맹과 병법을 두려워한다. 임기가 차서 경의 직책을 바꿔주어야 하는데, 아무리 살펴도 경을 대신할 만한 장수가 없다. 부디 그곳에 좀 더 머물러서 나의 북쪽 걱정을 덜어주기 바란다. 겨울날이 추우니 근일 편안히 지내라. 다른 말은 더하지 않는다.”(세종실록 6년 11월 29일)


 이 편지에서 세종은 하경복이 소중히 여기는 어머니의 안부를 전해 그를 안심시키고, 그간의 공로(국경방어, 백성 안심)를 칭찬하였다. 임기 만료로 후방으로 옮겨주어야 하나 “경과 바꿀 만한 인재가 없다”며 조금 더 수고해 달라고 당부한 뒤, 건강을 살피라는 다정한 당부로 편지를 마무리했다. (하경복은 결국 변방에서 15년간 근무하였다.)

 

 김종서와 하경복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세종은 인재뿐 아니라 그들의 부모와 형제까지도 귀하게 보살폈다. 그 덕분에 인재들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맡은 일에 온 정성을 다하였다. 세종 중반부인 1432년(세종 14년) 실록에는 “지금 인재가 매우 왕성하여 행정담당 정사를 다스릴 인재와 무예에 뛰어난 선비가 상당히 많으니 모두 벼슬하기를 원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의 열린 인재 등용 정책이 낳은 결실을 보여주는 증좌(證左)다.

신상필벌의 제도화와 능력 중심 인사철학의 실천

그런데 세종이 인재들에게 인센티브만을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국가 신뢰를 훼손하는 중대한 실책을 저지른 관리에게는 엄격히 처벌하였다. 한일 간 우호 관계를 깨뜨린 수군 지휘관 최완을 참형에 처한 일(세종실록 31년 4월 20일), 나라 곳간을 도둑질한 공직자 최맹온을 신하들의 반대에도 참형으로 단죄한 일(세종실록 7년 5월 19일), 진휼미를 훔친 수령 최세온 역시 참형에 처한 사례(세종실록 6년 8월 15일)가 대표적이다. 세종이 훙서할 때, 당대인들은 세종 치세의 비결의 하나로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엄정함에서 찾았다.

 

신상필벌의 핵심은 제도화에 있다. 자신의 행위가 어떤 보상이나 처벌로 이어질지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하고, 그에 따른 조치가 실제로 이뤄져야 한다. 특히 제도화는 자의적 포상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어떤 성과는 당대에 드러나지 않고, 다음 세대나 그 손자 세대에 이르러서야 결실을 맺기도 한다. 자신의 헌신이 후일이라도 정당하게 평가받을 것이라는 신뢰를 심어주어야 한다. 최고 권력자의 시혜가 아니라, 특허나 신분 안정처럼 제도적 보장이 뒷받침될 때 인재는 일에 몰입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세종이 맹인 음악가에게 ‘벼슬’이라는 인센티브를 부여한 일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1431년, 음악을 관장하던 관습도감의 책임자 박연은 시각장애인 음악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이들은 이미 시대의 쓰임이 되고 있으니[旣爲時用 기위시용], 국가가 이들을 돌봄은 마땅한 일입니다.” 박연에 따르면, 관현악을 맡은 시각장애인들은 “대부분 외롭고 가난하여도 하소연할 곳조차 없는 이들[無告之人 무고지인]”이었다. 게다가 관현악을 익히는 일이 워낙 고되다 보니, 젊은 시각장애인들은 점차 점쟁이로 전업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점을 치면 오히려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국가의 제례나 의식에 필요한 연주자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이었고, 이대로 가면 “장차 시각장애인의 음악은 끊어지고 말 것”이라는 게 박연의 깊은 우려였다.

 

박연은 시각장애인 음악가들에게 정기 급여 외에 쌀을 특별히 하사하여 “권려하고 흥기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특히 그들에게 관직을 제수해야 한다고 말하며, 그렇지 않으면 이들이 “이른바 세상의 버림받은 사람[天下之棄人]”이 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박연은 다음과 같은 등용 방침을 제시하였다. 오랫동안 공연을 한 자에게는 동반 5품 이상의 검직(檢職, 실무 없는 명예직)을, 젊고 총명하며 여러 악기에 능한 자에게는 7품 검직을 초임으로 제수하고, 연주에 능숙해지면 종6품 참직(參職), 즉 왕에게 나랏일을 아뢸 수 있는 벼슬을 주자고 말했다. 시각장애인 음악가를 양성하여 국가에 기여하게 하고, 본인은 물론 자손들에게도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파격적인 이 제안을 세종은 그대로 받아들였다(세종실록 13년 12월 25일).

 

세종의 결정은 단순한 시혜나 동정이 아니라, 재능 있는 이들을 제도 안에 품어 국가의 자산으로 길러낸 포용과 존중의 인사철학의 실천이었다. 장애 유무를 넘어 누구나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등용될 수 있다는 원칙이 600여 년 전 실현되었다는 점에서, 이는 대한민국 인사 제도의 이정표로 삼을 만하다. 오늘날 다양성과 포용의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는 시대에, 세종의 인센티브 제도는 지도자가 어떤 눈으로 인재를 바라보며, 어떤 철학으로 제도를 설계하느냐가 공동체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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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국가경영연구원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 대왕로 72, 세종마루
ifsejong12@naver.com